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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잣말

빈 일정에 대한 강박

구라도사 2023. 12. 1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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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표의 빈 칸을 보면 왠지 그 날은 헛되게 산 것 같다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강박증을 갖고 있는 사람처럼 일정표에 별 시답지 않은 것까지 기록하고서야 마침내 내가 하루를 열심히 산 것처럼 뿌듯해 한다.

왜 방구석에서 뒹굴다.’가 일정이 되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런 거라도 채워 넣어야 내가 오늘 하루를 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일이 없으면 없는 대로 바쁘면 바쁜 대로 일정표를 채워 나가는 게 순리이건만 이젠 일정표를 채우기 위해 일을 만드는 주객전도의 상황까지 벌어지곤 한다.

옛날 어떤 글에선가 남자는 아침에 밥숟가락 놓으면 밖으로 나가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라도 주워 와야 한다는 것을 보았다돌멩이 하나 주워 오는 게 뭔 대수라고 그러냐고 하지만 그 돌멩이가 나중에 담을 세울 때나 마당의 빈곳을 단단하게 메울 때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물론 이야기의 본질은 남자는 가정을 위해서 바깥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는 전근대적인 교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하나의 잠언처럼 뇌리 깊숙이 박혔다.

그래서일까.

마치 가장이 바깥에 나가 돌멩이를 주워오듯 나 역시 일정표에 쓸데없는 일정까지 기록을 한다.

이 기록이 훗날 편년체의 역사서처럼 위대한 기록 유산으로 남을지 누가 알랴?

물론 그 전에 내가 왕이 되거나 아니면 위인이라도 되는 게 먼저겠지만.

일정표를 가득 채운다고 바쁘고 하는 일이 많은 사람은 아닐 것이다

나 역시 일정의 태반이 반복되는 것이니까.

늘 같은 삶을 반복해서 살면서도 남들과는 뭔가 다르게 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싶어서일까?

오늘 빈 일정표를 보며 무언가 채우고 싶은 강한 욕망이 생기지만 그만 두련다.

정작 중요한 일은 일정표에 있지 않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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