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 그린 하얀 수채화 - 제 3의 길
내가 그녀의 곁을 의도적으로 맴돈 적은 없다. 단지 내가 우연히도, 정말 우연히도 갔던 자리엔 어김없이, 아니 항상 있던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있곤 했다.
담배 피우러 나간 자리에도, 도서관에서 책을 찾을 때도, 점심을 먹으러 갔을 때도, 또 수업 들어가는 중간에도 그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리고 더욱더 ‘우연’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종로나 혹은 을지로 거리를 친구들과 함께 걷다가도 그녀와 마주치게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마주침이 기억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유독 기억되는 이유는 단 한 가지이다. 그녀가 남달리 예쁘다거나, 아니면 그녀가 남들과 다르게 튀어 보인다든가, 혹은 유독 어두워 보인다든가 하는 이유가 아니다. 단지 어느 순간엔가 서로 눈이 마주치며 아는 듯한 눈치를 보이는 것이었다. 그것이 비록 나 혼자 느끼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혼자 느끼는 것일 수도 있다는 이유는 그러한 마주침은 너무 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흔하게 마주치는 사람들의 기억은 잠시 머릿속에 희뿌옇게 있곤 했고 그 중 자주 마주치거나 강렬한 인상을 가진 사람은 어느 순간엔가 내 기억 속에 각인되는 것이었다.
그 각인은 마치 아주 선명한 TV 화면과도 같이 뚜렷했고, 그것은 종종 생각으로 부상했다. 그러다가 다음에 그 사람과 마주치게 되면 나도 모르게 흠칫 놀라게 된다. 그리고 이 생각은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생각이건만 그 사람을 다시 마주치게 되면 부끄러운 감정이 먼저 가득 메우는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우연인 것은 확실하지만 너무나 필연적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그 필연적이라고 생각하는 감정은 그 사람과 우연적일 수도 있을 공상의 수채화를 그리게 되는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 대해 의식하게 된 것이 단 몇 번의 만남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가 기억된다는 것.
그것은 우연히 만나게 된 사람의 눈이 기억되는 것이다. 그 눈의 눈빛이 강렬하다든가 혹은 흐리멍덩하다든가 하는 일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나와 마주칠 때 마치 나처럼 상대방을 보고 흠칫 놀라는 눈초리를 보이는 사람이 기억되는 것이다.
그 눈초리가 가장 먼저 기억되고 그 사람의 형상이 직소 퍼즐식으로 맞춰진다. 사실 그녀가 나를 보고 그런 눈초리를 보였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단지 나 혼자 그렇게 느끼게 된 것일지도 모르지만, 그것 역시도 내가 그녀를 기억하는데 하등 상관없는 얘기다.
단지 내가 그걸 느꼈고, 그녀가 그런 것 같았고, 그것보다도 가장 큰 것은 그녀를 자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해서 그녀가 늘 기억 속에서 나부꼈다. 그 때문에 항상 언제쯤 또 마주치게 될까 하는 생각이 하나의 일상 습관처럼 똬리를 틀었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사람의 구별이 어려울 정도의 인파가 몰려 있을 때도 그녀를 알아볼 수 있었고, 사람 식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의 거리 밖에 서 있는 그녀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다만 이것은 그녀를 얼마나 마주치느냐 혹은 마주치게 되느냐 하는 식의 문제일 뿐이지 사실 내 생활에서 그것은 단지 하나의 ‘일’일 뿐이었다. 오줌 마려울 때 화장실에서 ‘일’을 보듯이. 거리를 걸으며 눈으로 그저 마주치게 되는, 다만 다른 것보다 조금 더 민감한 ‘일’일 뿐이었다.
화창한 초여름 날이었다. 햇볕은 따뜻함을 초월한 듯 강하게 자신의 눈앞에 드러난 모든 것을 데우기 시작하였다. 거리엔 언제부터인지 짧은 반소매 티들이 공중을 떠다녔고, 하나둘씩 코끝에 선글라스가 걸쳐져 있었다.
거리는 베네톤 옷 색깔처럼 갖가지 색감들이 넘실대고 있었다. 거리의 나무들은 전에 보았던 거의 전라에 가까웠던 거리의 여자 모습을 서서히 벗어가고 있었다. 모두가 벗을 무렵 나무는 두껍게 껴입고, 모두 입을 무렵 나무는 모든 것을 벗어 바람에 날려 버린다.
아카시아 향기는 달콤했고, 그 향기로 인해 누구든 거리로 뛰쳐나가고 싶어 할 정도였다. 자동차들도 전에 없이 한가로이 검은 아스팔트 위를 기어갔고, 세상은 이제 막 잠을 깬 것 같은 물빛 아침 모습이었다.
이런 날 누군가를 확실히 알아본다는 것은 감정상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졌다. 나 역시 그런 거리의 분위기에 휩쓸려 등교하고 있었다. 어느 누가 애인과 팔짱을 끼고 가건, 휘파람을 불고 걷던, 아니면 물건을 사러 상점에 들어가던 나의 이런 기분에 조금도 흠집을 낼 수 없었다. 단 한 사람과의 만남을 제외하곤.
멀리서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나의 노력으로 그녀가 그녀임을 확인한 것이다. 먼발치서 보았기 때문에 처음엔 확신하지 않았다. 내 눈이 잘못 본 것이라 확신했다. 그러나 이제껏 도취되었던 그 기분은 바람에 아카시아 향기 날리듯 모두 날아가 버렸다.
점점 다가올수록 내 눈을 믿지 못하던 내 생각을 믿지 못했다. 왜 유독 그녀와의 마주침을 이리 특별한지 알 수 없었다. 그녀에 대한 감정을 전혀 없었다. 단지 마주침이란 것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부여할 뿐이다. 그런데 왜 하필 그녀일까?
나는 그녀를, 그녀는 나를 아무 일 없듯이 스쳐 지나갔다. 단지 그뿐이면 좋으련만 자꾸 뒤를 돌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머리 가득 다시 TV가 켜졌다. 작가, 연출, 주연이 모두 나인 공상의 영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리 계속되지는 않았다.
어디선가 아카시아 향기가 날아 왔고, 나는 원래 내 기분 상태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단지 마주친 것뿐이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
수업 도중에 갑자기 오전에 그녀와 마주친 상황을 떠올렸다. 나는 이제 시청자가 되어 그 TV 속의 영화를 보고 있었다.
“뒤를 돌아봐. 그녀가 널 바라보고 있잖아.”
나는 안타깝게 나에게 말을 걸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아니었다. 나의 말을 듣지 못하는 하나의 주인공일 뿐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고 그냥 앞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제길…. 왜 뒤를 안 돌아봤지.”
공상 속의 TV를 끄고 공책에 무언가 끄적거렸다. 하지만 곧 이 역시 내 생각일 뿐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나를 돌아봤다는 것은 내가 뒤를 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상상할 수 있는 권리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상상 역시 기억의 언저리로 묻혀 갔다. 내 기억 넘어 요단강을 건너 먼지 쌓인 공동묘지에 또 하나의 무덤을 파고 눕게 되었다.
수업 후 점심을 먹으러 가는 길이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그녀와 눈앞에서 마주쳤다. 늘 먼발치서만 보던 그녀였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녀는 나의 시계에서 점점 멀어졌다. 하지만 금방 그녀가 나의 시계를 온통 메웠다.
나의 시계엔 시계가 가지 않았다. 모든 것이 멈춘 듯. 그녀는 살짝 웃으며 자리를 비켜 주었다. 아니 웃지 않고 비켜 주었는지도 모른다. 단지 내 멈춰진 시계 안에서 그녀는 멈춰진 시계를 깨고 움직였기 때문에 착각한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 역시 별 의미 없는 것이다. 나는 그녀의 얼굴을 처음 똑바로 보게 되었다. 하지만 그 똑바로 본 얼굴을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보였던 그녀의 모습이 다시 예전처럼 뿌옇게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왜 떠오르지 않는 거지?”
그녀의 모습은 점점 늪에 빠지고 있었다. 허우적대는 그녀의 모습. 손을 뻗어 그녀를 잡아끌었다. 그러나 그럴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난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점심을 먹고 캠퍼스에 잠시 누웠다가 잠이 들었던 것이었다. 깜짝 놀란 이유는 친구가 나를 흔들어 깨웠기 때문이다.
“손을 왜 하늘로 뻗어?”
그는 핀잔하듯 말했다. 나는 그의 말을 언어의 벽 너머로 흘려버리고 나의 꿈을 되짚어 보았다.
꿈에서 왜 그녀가 늪에 빠졌으며, 난 왜 무심하면서도 그녀를 도우려 손을 뻗었을까?
알지 못할 미궁에 빠져들었다. 잔디밭에서 일어나 다음 수업을 위해 걷는 동안 꿈에서 늪에 빠져 있던 그녀를 깨어 있는 의식에서 끌어올리려 했지만, 도무지 끌려 나오질 않았다. 차츰 그녀 역시 꿈과 같이 기억의 뒤안길로 사려져 갔다.
수업은 진행되었고, 기억은 기억 속에서 기억될 뿐이다. 그 외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때론 기억 속의 기억이 무언가를 지워버리는 일이 중요했다.
어쩌면 기억 속의 기억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 속의 기억을 망각한 채로 무심히 수업이라고 명명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기억 속에 기억된 기억을 어느 순간 망각해 버리는 것. 그래도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는 것. 그것만이 기억 속에서 다시 반추될 뿐이었다.
수업이 끝나고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잠이 들었던 잔디밭 그 자리에 다시 앉았다. 그녀와 마주치는 일은 우연이다. 결코 필연이 아니다.
하지만 우연은 무엇이고 필연은 무엇이란 말인가?
사실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 일도 아니다. 단지 내 생각으로 사건이 진행되고 내 생각으로 무엇을 하는 것뿐이다. 내 생각 안에서 나를 조롱하듯 흐르는 공상만이 전부일 뿐이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그리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그녀는 내 세계에 있었고, 의도하려 해도 그녀는 내 세계에서 떠나지 않는다.
담배 연기를 깊숙이 빨아들였다. 담배 연기가 내 가슴 안에 구름을 심어 놓았고, 그 구름은 비를 내렸다. 그 비가 나를 적셨다.
정문을 나설 무렵 희미한 얼굴이 내 눈에 비쳤다. 그녀 이외, 심지어는 거울로 비치는 내 모습마저도 알아볼 수 없는 나에게 어떤 사람의 형상이 비친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내 눈에 들어온 사람이 다른 사람인 줄 알았던 내 눈, 내 의식의 실수였다.
그녀가 서서히 내 눈앞으로 다가왔다. 늘 이 정도, 하루에 두서너 번 정도는 마주치지만 유독 오늘만은 그녀와 자주 마주친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로 인해 하루의 분위기가 바뀐 날은 오늘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등교할 때 그녀를 보지 않았던들 하루가 이처럼 몽롱하게 흐르지 않았을 테고, 오늘 하루와는 다르게, 그것이 좋건, 나쁘건 간에, 하루의 공백을 메웠을 것이다.
그녀로 인해, 아무 상관 없고, 아무 감정 없는 단순히 마주치는, 특이하다고 할 만한 것도 없이, 극히 우연적인 마주침 때문에 하루가 내 의도와 다르게 흘렀고, 또 지금 나의 하루가 종식될 무렵 극히 단순하게 마주치는 이 일 때문에 하루를 반추하게 되고 나의 하루에 대해 후회 혹은 막연한 미련을 갖게 되는 이 일….
나는 처음으로 나의 이성을 의심하였다. 그간 나를 완벽한 인간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나의 이성, 즉 내가 보아 온 것이 모두 옳게 본 것인가 혹은 내가 느끼고 있다고 느끼는 이 감정이 과연 내가 진정 ‘느끼는’ 감정인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이 내가 내 논리적인 판단에 대한 오류를 그간 느끼지 못했음을 비난하는 것같이 느껴졌다. 그녀가 다가옴에 따라 느끼게 되는 이 감정이 과연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인가? 나는 내 감정에 대해 도박을 걸었다.
“저….”
나의 말에 그녀는 발걸음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그때까지 생각해 왔던 눈과는 판이하게 다른 눈이었다. 저녁 햇빛에 반사되는 그녀의 눈빛은 의심 반, 호기심 반으로 가득 차 무엇도 더 이상 허락되지 않은 그런 눈빛이었다.
내가 늘 떠올렸던 나를 아는 듯한 감정의 떨림이 숨어 있는 눈빛은 아니었다. 내 생각이 옳다고 판돈을 건 나는 뜻밖에 내 패가 완전히 나쁜 것임을 깨달았다.
“무슨 일이시죠?”
그녀의 그 말에서 나는 다른 의미를 찾아내려고 애썼다. 마지막 남은 히든카드에 목을 건 도박사처럼.
‘무슨 일이시죠?’
그렇다면 그 말은 나를 늘 보아 오던 그 사람이 무슨 일이 생겨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이라 여기는 걸까?
아니면 내가 무언가를 부탁하기 위해 말을 건 것으로 생각하고 그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없는지를 판단하기 위해 하는 말일까?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정작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나와 왜 이리 자주 마주치죠? 인연이 있나 봐요.’ 나 ‘왜 내 기억 속에서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까? 누가 허락했습니까?’ 하는 것, 혹은 ‘왜 내가 생각했던 눈빛, 나를 아는 듯한 떨림의 눈빛을 보이지 않는 거죠?’ 하고 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는 사람인 줄 알고….”
나는 강자 앞에서 드러내 보였던 꼬리를 감추는 개 모양으로 말꼬릴 감췄다. 내 의식 속에서 그녀의 모습은 그렇게 끌어내려 애쓰던 아까와는 달리 스스로 꾸물꾸물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새롭게 그녀의 모습이 각인되고, 주파수가 잘 맞춰진 FM라디오처럼 선명하게 되었다.
“아, 그러세요?”
그녀는 웃음을 띠며 내 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녀의 웃는 모습이 내 기억 속에 새롭게 인식되었다.
그녀의 웃는 모습.
새까만 캔버스 위에 하얀 유화 물감으로 그녀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었다.
점점 멀어지는 말소리와 함께 재빨리 그려지고 있는 크로키와 같은 그림.
온통 하얀색으로 채색되고 있는 눈의 떨림과 웃고 있는 모습.
내 동공 밖으로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같이 선명한 그림으로 그려졌다. 그녀가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발소리는 계속 들렸다.
그 후로 나는 그녀와 마주칠 때면 가벼운 눈인사를 보냈다. 물론 그 일이 특별한 계기가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와 내가 눈인사 정도라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같은 수업을 듣는다는 묘한 연대감이었다.
그녀는 나의 눈인사를 매정하게 뿌리치지 않았다. 그녀도 눈인사에 대한 응답으로인지는 몰라도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얼굴은 내 의식 속에 계속해서 새롭게 각인되어 갔고, 그 모습은 하나의 앨범처럼 펼쳐 볼 수 있을 만큼 내 기억 많은 부분을 잠식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곁을 의도적으로 맴돌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여전히 확신 없는 미지에 대한 것이었다. 그녀에 대한 어떠한 사적 감정을 품지 않은 채로 맴도는 것뿐이었다. 그 진정한 이유는 내가 느꼈던 알지 못할 눈빛의 정체를 알고 싶었던 것뿐이었다. 알지 못할 눈빛을 아는 것. 단지 그 이유뿐이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주위를 항상 맴돌고 있던 먼지들이 가라앉았다. 거리는 우리 시대의 회색빛 젊음을 펼쳐 놓은 듯하였다. 그런 날씨는 내 마음에 욕조 안에 잉크를 풀 듯 우울을 풀었다. 이제 막 정신을 하늘로 뻗은 채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는 나무에게 이 비는 상쾌함을 심어 주는 것이다.
모여 있을 때는 희거나 푸르게 보이는 물이 흩어져 내릴 때는 유일하게 만유인력에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것들이 회색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나무이고 싶었다. 나무이고 싶은 생각에 공상의 가지치기가 시작되었고, 현실 아닌 현실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때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어서 여러 공상들을 혼합시켰다.
머리 안에 섞여 있는 불순물들을 날려 보내기 위해 창문을 열었다. 먼지 묻은 빗물은 빗내를 풍기며 세상에 내리고 있었다. 비 오는 날 오후 텅 빈 강의실은 시계가 멈춰진 듯하였다.
비와 함께 흘러가는 시간을 내리는 비로 인해 망각하게 된 것이다. 불감(不感)은 때론 감각으로 더 상쾌하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도 잠시뿐이었다. 어둑어둑한 강의실 안으로 우울함이 스며들었고, 나는 강의실 한구석에 서 있는 우울한 객체일 뿐이었다. 빗소리마저 정적에 파묻혔다.
저 멀리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묘한 떨림을 느꼈다. 그가 누구인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내 시각으로 새로운 색깔의 세계가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 사람으로 인해 나의 무채색 마음속에 어느 정도 채도가 서리게 되었다는 그것이 나를 흥분시킨 것이었다.
그것이 여기가 어디이며,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게 해 주었고, 내가 아직 무언가를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묘하게도 그녀의 얼굴이 유일한 색깔 안에서 그려져 있었다.
늘 검은 캔버스에 흰색으로 그려지던 그녀의 모습이 홍조를 띤 모습으로 새롭게 떠올랐다.
그녀일까?
나는 창문을 닫았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고, 확인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확인한다 해도 그것이 내게 가져다줄 무언가에 대한 발견의 기쁨보다는 스쳐 지나간 후에 쓸쓸함의 골이 더욱 깊어질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책가방을 들고 강의실을 빠져나왔다. 저 멀리 복도가 어두운 목구멍을 벌리고 있었고, 고장 난 형광등이 목젖과도 같이 작게 떨리고 있었다. 정적은 나의 발소리에 움찔거렸고, 복도 바닥은 침묵의 잠을 깨우는 나의 발 때문에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복도 끝 로비에 도달하였다. 로비 밖은 비 오는 거리다. 로비 안은 이방인이 서 있는 침묵의 공동체이고.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내가 우산이 없다고 해도 그 사람과 같이 우산을 쓰고 갈 이유가 없었으며 나 역시 모르는 사람과 조그만 우산 안에서 비를 피하며 같은 시간을 보내기 싫었다.
차라리 빗속에서 나만의 여유로운, 남들과 양분하지 않아도 될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는 그 심연의 색으로 걸어 들어갔다. 금방 우울은 나의 몸을 적셨고 느린 걸음으로 나는 우울을 받아들였다.
비를 맞고 있던 나무들이 왜 상쾌하게 보였는지 알 것 같았다. 온몸으로 퍼지는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 주는 이 감각. 비는 생을 깨닫게 해 주었다. 한 걸음씩 발을 떼어 놓을 때마다 바닥에서 솟구쳐 오르는 빗방울들. 발에 축축이 젖어드는 야릇한 쾌감이 생의 감각을 더욱 부추겼다.
“….”
뜻밖에 나는 그녀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가는 이도, 비를 피하고 있는 이도 아니었다. 그녀는 회색 비보다 더욱 짙은 어두움으로 온몸을 감싼 채 비를 맞고 있는 이였다.
그녀에게 이 비는 무엇일까?
그녀는 나무와 같은 부류의 인간은 아일 것이다. 나무와 같은 부류라면 그렇게 짙은 어두움을 온몸에 품고 걷지는 않을 테니까.
비를 맞고 있는 두 사람.
두 사람은 각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긴 머리를 젖혔다. 머리 사이에 있는 손은 피곤에 젖어 있었다. 연민도 동정도 아닌 감정이 나를 감쌌다. 그녀에게 처음으로 느낀,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피곤도 비가 만들어 낸 감정일 뿐인가?
사람들은 옷으로 몸을 동여맨 채 비의 내림을 피하고 있었다.
비가 무서운 것일까?
비가 더럽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그 더러움 역시 우리가 만든 것 아닌가?
우리가 만든 모든 것이 더러울 수밖에 없지 않는가?
테크놀로지, 이데올로기, 철학, 문학, 음악, 미술 심지어는 계속 생산되는 인간까지!
우리가 만드는 모든 것이 더럽다는 전제하에 우리는 모든 것은 무서워하는 것이다. 모든 것이 무서워 자신이 만든 성 안으로 피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 순간 나는 비를 맞는 내가 대단히 용기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녀 역시도. 다만 그녀는 비관적인 용자(勇者)일 뿐이었다. 인간이 만든 것을 우울함에 젖어 사랑하는, 마치 눈물에 의해 흐려진 세상을 보듯.
나는 그녀 곁으로 갔다. 남들이 보기엔 비를 맞는 두 남녀이지만, 그녀와 나 사이엔 아무런 커뮤니케이션도 일어나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그녀와 나는 비를 맞는 남남이었다.
그러나 내가 그녀 곁에서 걸으면서 느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우리를 남남이 아닌 빗속에서 의식의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남녀로 보고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우리가 커뮤니케이션을 나누고 있을 수도 있다. 우리의 무의식은 아마 내가 모르는 사이에 그녀와 대화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대화 없는 대화를.
하지만 그것 역시 내가 알지 못하는 대화일 뿐 사실상 우리는 아무 대화 없이 그냥 걷고 있는 것일는지도 모른다. 나는 내가 가야 할 곳까지 그녀와 함께 걸었다. 그녀는 일상적인 눈빛도, 자기의 행동 영역 안으로 침범해 들어온 이방인에 대한 의식도 없었다. 단지 입을 꼭 다문 채로 걷고 있을 뿐이었다.
갈림길에 다다랐다. 나 역시 그녀 옆에서 아무 말 없이 걸었고, 내 의식으로 부상하는 갈림길을 느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할까?
갈림길로 들어서기 바로 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생각을 무시하고 내 앞에 펼쳐진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몇 걸음 떼어 놓고 나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그녀의 생각을 눈빛으로 보내는 시선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섰다.
무엇 때문에 돌아본 것일까?
자신에게 또 그녀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왜 쳐다본 것일까?
무언으로 같이 걷던 이가 떠나감을 아쉬워하는 것일까?
자신을 따라오리라 믿었던 내가 내 갈 길을 가서 원망스러운 것일까?
확실한 눈빛을 느꼈지만, 그 눈빛은 모호했다.
그녀는 비를 맞고 나를 쳐다보는 모습으로 재각인되었다. 그녀가 무슨 이유로 비를 맞건, 왜 침묵을 하고 걸었건 그것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다. 단지 중요한 것은 비를 맞고 있었다는 것뿐이다.
많은 생각들이 눅눅한 지하철 분위기를 가중시켰다. 눅눅함, 내 몸의 젖음, 그리고 비를 맞고 있는 그녀의 모습.
나는 눈을 감았다. 밖에서 누가 비를 맞건 누가 무엇을 하건 나는 그 눅눅함 안에서 편할 수 있었다.
나는 감기에 걸렸다. 비 때문이었다. 비는 나의 의식을 분열시켰고, 내가 하나가 아님을 깨닫게 해 주었다. 내가 하나가 아닌 것은 감기 때문만은 아니다. 빗속에서 전파들이 나를 자극시켰을 것이다.
맑은 날에는 하늘 위로 날아다니던 전파들이 비 오는 날에는 비에 젖어 흘러내리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침묵했으며, 왜 나를 쳐다보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녀가 보낸 많은 비에 젖은 전파들, 나는 그것을 감지하지 못하고 머릿속의 자극으로만 여겼기 때문이다.
그녀의 눈빛은 원망이었다. 그 원망의 눈빛은 차가웠으며, 그것은 나의 온몸을 감싸고 한기를 불어 넣었다. 그 차가운 원망의 눈빛이 나에게 감기를 가져다준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다. 그 모든 원인은 나의 무지로부터 기인하기 때문이다.
등교하는 길은 피곤의 융단 위를 걷는 것 같다. 비 그친 거리는 투명한 유리 빛깔이지만 내 의식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피곤한 갈색뿐이었다.
“안녕하세요?”
나는 그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녀였다.
“….”
우리는 똑같은 상황을 정반대 상황에서 겪게 되었다. 맑은 날 오전 수업을 듣기 위해 가는 상황. 전날 오후와는 전혀 반대되는 분위기에서 우리는 똑같은 길을 반대로 걷고 있었다. 둘은 또다시 나란히 걷지만, 또다시 침묵 안에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또다시 우리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나는 갈림길 앞에서 머뭇거렸다. 두 번째 상황이 나에게 어색함을 주었다.
무얼 할 수 있을까?
시원한 바람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많은 공기가 내 주위에서 나를 숨 쉬고 있었다. 거리는 투명 유리에 가린 듯 약간 흐려 보였다. 그녀와 갈라서던 길을 떠올렸다. 아마 그 약속이 무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의미하다 해도 나름대로 의미 부여는 가능할 것이다.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도 낯선 피곤이 몰려왔을 때였다. 지하철 안에서 무의미한 시간을 피곤과 더불어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 깜짝 놀라 눈을 떴다. 그때 내 옆에 앉아 있던 소년과 마주쳤다. 그 소년은 나를 갸우뚱 고개를 흔들며 보았다.
그 애가 날 알까?
하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그 소년은 아무 일 없듯 자리를 떴고, 나는 눈을 감아 잠의 이불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그 소년의 눈빛이 계속 나의 이불을 걷었고, 나는 그 소년의 눈빛을 생각하느라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다.
누굴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소년의 눈빛이 흐릿해졌고 차차 사라졌다. 그러한 마주침이 의미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마주침에서 난 시간을 깨달았고, 누군가 처음 보더라도 그 사람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라짐이란 것이 꼭 그리 슬픈 일만은 아니라는 것도 알았다. 그 소년을 지금 다시 본다 해도 그 소년임을 알아차릴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그는 하나의 형상으로 남아 부표처럼 내 의식 위로 떠오를 수 있다는 것을, 또 그러한 마주침이 현실에서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저….”
나는 발걸음처럼 무겁게 입을 열었다. 그녀는 우리가 암묵적으로 지켜온 침묵의 의사 교환이 깨진 것에 약간 놀랐는지 동그란 눈을 하고 나를 보았다. 나는 속으로 작은 목소리를 내며 말했다.
‘오늘 오후 세 시에 뵙고 싶군요. 특별히 이렇다 하는 감정은 없지만 얘기해 보고 싶어서요.’
“저는 이쪽으로 가는데요.”
나는 정작 이렇게 말했다. 그녀는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떡였다. 나는 발걸음을 서서히 돌렸다. 그녀 역시 천천히 자기가 갈 길을 걸어갔다. 우리는 같은 길을 걷다가 헤어져 각자의 길을 가고 있다.
만날 수 있는 길이란 정해져 있는 것일까?
같은 길과 갈림길?
나는 뒤를 돌아 그녀가 천천히 걷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고 그 뒷모습에 대고 난 크게 소리쳤다.
“우리 같은 길도 아니고 다른 길도 아닌 제3의 길에서 다시 보죠.”
그녀는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녀의 대답을 무언으로, 눈빛으로, 바람에 흩날리는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멈춘 발걸음으로, 그녀와 내가 만든 침묵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들었다.
미미한 끄덕임. 그것이었다.
그녀의 모습은 미미한 끄덕임이었다.
그녀와 언제 만나는 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제3의 길이란 장소가 있으니 언젠가는 만나게 될 것이다. 제3의 길이 어딘지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곳이 존재한다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일이 있어도 우리는 평범하게 눈인사 정도 나누었다. 나는 그 제3의 길에선 우리가 다른 인간이 되리라 믿었다. 똑같은 시간이 흐르는 공간에서 제3의 길만 동떨어져 있는, 그리고 그녀와 나는 남이지만 남이 아닌 곳, 그곳이 제3의 길인 것이다.
안개 낀 이른 아침이다. 이른 아침에 안개가 끼는 일은 종종 있지만, 그 안개는 늘 다른 느낌을 준다.
아침에 깨어나 부스스한 모습을 더욱 나에게 선명하게 보여 주는 것.
남들이 자세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내 자신을 더욱 자세히 보게 하는 것.
나는 안개가 자욱하게 낀 거리를 수런거리는 소리와 함께 걸었다. 소리와 함께 걷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뿌옇게 흐린 눈앞에 보이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이 소리만이 흩어져 다니고, 나는 나 아닌 다른 이의 얼굴조차 보지 못하는, 또한 내가 나를 보지 못하듯이 남들도 나를 보지 못하는 그런 것이 두려웠다.
안개 속에선 남이 내가 되고 내가 남이 된다. 나 역시 남에겐 보이지 않으며, 소리로써 존재할 테고 그 소리를 자신이라 남들도 여길 것이 분명하다. 남이 내가 된다는 것, 내가 남이 된다는 것은 밝은 날 나신으로 거리로 던져지는 일보다 더욱 수치스러운 일이다. 남들이 내 생각을 몽땅 알아버릴 것 같은 예감. 그것은 누구에게나 두려운 일일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내가 평소에 가던 길이 아닌 낯선 길로 나는 걷고 있는 길이다. 문득 나는 제3의 길을 생각했다.
남도 걸어 보지 못하고, 나도 걸어 보지 못한 이 세상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길.
그녀를 만나리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저 난 새로운 길을 걷고 싶었다. 바로 눈앞에서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그녀일까?
그녀가 아니라도 상관없으며 그녀라도 상관없다. 안개 속에선 누구나 나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제3의 길에서 만나게 되는 나이기에.
상상했고, 의도도 했지만, 그녀였다. 길옆에 서 있는 나에게 다가오는 그녀였다. 그녀가 내 앞으로 다가왔다. 안개 속에서 보는 그녀의 눈빛은 더욱 선명했다.
“이 안개 낀 길을 좋아하세요?”
그녀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녀가 내게 대답하듯이 눈빛으로 대답했다.
“안개 낀 길은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길이 되기 쉽죠. 오늘 만날 것 같았어요.”
그녀의 말은 어렵다. 나는 그녀의 말을 차근차근 곱씹어 보았다. 안개 낀 길은 길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길이 되기 쉽다. 우리는 안개 낀 길을 걸었다. 그 길은 길이 되기 쉽다.
“항상 안개 낀 거리에서 평면의 공간을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은 안개가 걷혀갈 때뿐이죠.”
안개가 걷혀 가는 것, 시간이 흐른다는 것. 그렇다 눈에 무언가 보여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왜?”
그녀의 돌연한 질문에 걸음을 멈추었다. 안개 속으로 사라지려 하던 그녀는 걸음을 멈춰 나를 돌아보았다.
왜일까?
무엇을 묻는 건지 그녀의 모습처럼 어렴풋하게 떠올랐다.
“안개 속에선 내가 남이 되고, 남이 내가 되죠. 난 나에게 손님이고, 타자이고, 뿌연 형상이죠. 거울을 오랫동안 본 적 있나요?”
그녀는 다가올 생각이 없는지 그 자리에 서서 고개를 저었다.
“거울을 오랫동안 보면 저 모습이 내 모습인지 내 모습이 저 모습인지 모를 때가 있죠. 내가 나를 모른 채 남이 되죠. 안개는 거울이다. 그게 답이에요.”
안개가 거울이다. 그건 거울은 안개라는 말이다. 그녀도 그렇게 느낄까?
그녀는 나에게 다가왔다. 그녀의 다가옴은 목조르기다.
답답함이 사라질 무렵부터 찾아오는 알지 못하는 쾌감처럼.
희뿌연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나의 의식이 죽음을 잊은 채 그것에 열중하게 되는 목조르기처럼.
안개 때문에 그녀가 다가오는 것을 희뿌연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다가옴은 황홀한 죽음의 느낌이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을. 조금.”
그녀의 말은 끊겨서 들렸다. 그녀가 아는 것은 끊김을 아는 것이다.
끊김.
그녀는 돌아섰다. 나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건네지 않았다. 그것은 서로 간의 침묵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주위의 안개가 서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녀는 낯선 남이 되어 갔고, 이 길도 의식 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나는 서서히 남을 보며 나를 느꼈고, 나의 또 다른 길을 찾아갔다.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모든 길이 제3의 길이에요. 그렇죠?”
그녀의 소리는 안개의 소리가 아니다.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나를 보고 있었다.
“예전엔 당신은 나의 거울이었는데, 이제 당신은 안개 속에 있네요.”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녀는 우산을 쓰고 학교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멀리서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
그녀가 찾은 제3의 길을.